올 초 글로벌 증시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공지능(AI) 관련 주식에 대한 투자심리가 식어가고 있다. 이는 중동 전쟁 확전과 같은 지정학적 위기감이 커지는 가운데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지연과 시장의 기대를 밑도는 반도체 업황 등과 결합되어 증시의 변동성이 증가할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지난 19일, 엔비디아의 주가는 10% 하락하여 762달러로 떨어졌다. 이로 인해 하루 동안 2000억 달러의 시가총액이 증발하였으며, 엔비디아의 시가총액은 2조 달러로 붕괴되었다. 이는 2020년 3월 이후 최대의 하락폭이었다. 브로드컴, AMD 등의 AI 반도체 주식들도 함께 급락하였고, 필라델피아 반도체 지수는 하루 만에 4.12% 하락하였다. 엔비디아의 주가는 올해 들어 지난달 말까지 98% 상승한 상태였다. 그러나 최근 고물가와 고금리 우려가 다시 부각되면서 반도체 업황에 대한 회의론이 나오고, 큰 폭의 조정이 이어지게 되었다.
엔비디아의 주가 하락은 엔비디아로부터 GPU를 공급받아 서버 컴퓨터를 제조하는 슈퍼마이크로컴퓨터가 잠정적인 실적 발표를 미룬 것 때문이다. 이로 인해 슈퍼마이크로컴퓨터의 주가는 25% 하락하였고, 이는 엔비디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또한, 옵션 만기일을 맞아 풋옵션 수익 극대화를 위한 현물 매도세가 발생하였다.
지난 17일, 네덜란드의 반도체 장비 회사인 ASML은 전분기 대비 27% 하락한 매출을 발표하였고, 18일에는 대만의 TSMC가 올해 메모리를 제외한 반도체 시장 성장률을 '10% 이상'에서 '10% 수준'으로 하향 조정하였다. 전세계적으로 거시경제 환경이 급변하는 상황에서, 이전에 급등한 테크 주식들의 차익 실현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설명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찰스슈왑의 선임 투자 애널리스트인 케빈 고든은 FT와의 인터뷰에서 "테크 주식들에게 힘든 날이다. 연초에는 좋아보였던 것들이 이제 거꾸로 흘러가고 있다"고 말하며, 투자자들의 심리가 변화하였다고 설명했다. 주말 사이에 엔비디아의 충격에 따른 조정이 22일에도 나타날 것을 우려하는 분석도 있다. 대만의 TSMC를 비롯하여 일본의 도쿄일렉트론, 한국의 SK하이닉스 등은 모두 엔비디아의 밸류체인에 속한 회사로, 엔비디아의 주가와 유사한 추세를 보여왔다. TSMC와 마찬가지로 시장의 기대를 어느 정도 이루지 못하는 가이던스는 주가의 급락과 연결될 수 있다.
한화투자증권의 연구원인 박승영은 "국내 반도체 업종의 2024년 당기순이익은 40조 7000억원으로 예상되며, 2021년의 49조원과 비교해 10조원 정도 낮아질 것이지만 주가는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며 "국내 반도체 업종의 실적 전망은 꾸준히 상승할 것이지만, 시장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번 주에 예정된 삼성전자, SK하이닉스를 비롯한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의 실적 발표와 컨퍼런스 콜은 향후 반도체 주식의 흐름을 결정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