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비스 프레슬리는 어머니의 생일 선물로 자비로 음반을 선물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시도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역 가수 선발 오디션에 참가했지만 탈락했습니다. 오디션을 주관한 가수 에디 본드는 "음악으로 성공하기 힘들기 때문에 트럭 운전만 하는 게 낫다"고 조언했습니다.
1935년 오늘, 엘비스 프레슬리는 미국 미시시피 주 투벨로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위해 음식을 사기 위해 위조 어음을 사용하여 감옥에 갇혔습니다. 엘비스는 가난한 환경으로 인해 흑인 빈민가에서 자랐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흑인 음악에 익숙했습니다. 수줍은 성격의 엘비스는 10살 때 노래 대회에서 5등을 했고, 이듬해 어머니로부터 기타를 선물로 받았습니다. 악보를 읽을 줄은 몰랐지만 레코드 가게에서 음악을 듣고 연주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엄마가 사준 기타로 컨트리 음악을 부르는 것을 "마마보이"라고 놀렸습니다. 중학교 때 음악 과목에서는 "C" 학점을 받았고, 교사는 성적표에 "음악에 재능이 없다"고 썼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트럭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마치 감옥에서 풀려난 것 같았다." – 밥 딜런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게 영향을 미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 존 레넌
엘비스의 목소리가 흑인 음악을 대중에게 전파하고 싶었던 선 레코드의 프로듀서 샘 필립스의 귀에 들리게 되었습니다. 1956년 1월 발표한 'Heartbreak Hotel'은 미국에서 1위 히트곡이 되어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엘비스가 인기를 얻자, 백인들은 "부끄러운 줄 모르고 흑인 노래를 부른다"고 비웃었고, 일부 흑인들은 자신들의 음악을 훔쳐갔다고 비난했습니다. 엘비스는 '골반'이라는 별명과 '엉덩이 춤'으로 공격을 받았습니다. 1956년 플로리다 법원은 "엘비스는 야만인이며 공연 중 엉덩이 춤을 추면 즉시 체포하겠다"고 판결했고, 그 이후로 엘비스는 플로리다 공연 중 몸을 움직이지 않고 '손가락 춤'만 추게 되었습니다.
그 후의 엘비스의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군 복무를 하느라 음악 활동을 중단해야 했고, 한동안 영화계에 참여했지만 다시 돌아와 팝 음악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엘비스가 음악 교사, 지역 유명 가수, 매니저의 비판에 자신의 꿈을 포기했다면 '왕'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왕이 되려고 했던 평범한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그는 항상 최선을 다하고 공연할 때마다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과 '왕'이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왕'이 되기 전의 '평범한 사람'이 아닌가요? 아니면 비록 작은 영역일지라도 이미 '왕'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은 눈감고 있는 사람을 혼자 알아보고 도와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꿈은 무엇인가요? 나이가 꿈을 이루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세상이 왔는데, 뒤늦게 '왕'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부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매 순간 최선을 다해보세요.